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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좌파어린이



1. 86년 여름

86년. 도덕이었나, 사회였던가. 숙제가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를 다섯 개 조사해오기]

수업시간에 딴 생각을 했던 건지, 나는 '민주주의'라는 말뜻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교과서를 다시 찾아봐도 뭔 소린지 모르겠고.. 형편이 뭐해서 그 흔한 전과도 없는 탓에, 결국 내 숙제를 도와주는 건 대학졸업반인 큰 오빠. 몇몇 선진국 이름을 불러줘서 숙제를 마쳤다.

다음날, 선생님께서는 숙제검사를 하신다며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발표를 시키시고... 드디어 내 차례.
공책에 적힌대로 읊어내려가던 나에게 갑자기 -


- 한국이 빠졌잖아.

-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데요.


동급생들은 웅성웅성. 선생님의 지긋한 눈길이 나에게 박힌다.


- 한국도 민주주의 국가에 속한다.

- 근데... 우리 오빠가 한국은 (민주주의국가가) 아니랬는데요...


선생님은 더이상 말씀이 없으셨지만, 나는 웬지 등줄기가 오싹했다. 머리 속에는 오빠 얼굴만 떠오를 뿐.




2. 86년 가을

엄마의 친한 교우(敎友) 중에 남편을 여읜지 얼마 되지 않은 데레사라는 분이 계셨다.
어느날 인기척이 들려 나가보니 데레사 아주머니가 쿨피스 한 팩을 사들고 찾아오셨다.
그날따라 눈이 빨개져 있던 엄마가 아주머니의 두 팔을 잡으니, 힘겹게 미소짓던 표정이 무너져내리며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철철 났다.


- 반장님, 아직도 00 이를 못찾았어요... 아이고~ 어떡해요~ 난 이제 어떡해~~ 애들 아빠도 없고.. 난 어떡해~


아주머니의 등을 다독이며 달래던 엄마도 본인의 눈물을 어쩌질 못해, 둘은 엉겨붙어서 한참을 통곡했다.
건대를 다니던 데레사의 아들이 미국문화원인가를 점거해서 농성을 하다 잡혀갔는데, 시내의 어느 경찰서를 가봐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엄마는 엄마대로 당시 경찰이셨던 막내이모부에게 전화를 넣어 좀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하셨건만 그의 행방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 걔는 주동자가 아니야....! 그냥 선배 따라서 간거야..!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엉엉


일주일인가 시간이 흘러서 그 집 아들이 돌아왔다. 그를 만나볼 일은 없었지만 어머니는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 구둣발로 거기를 밟아서 아주 짓이겨놨다더라. 고문을 해가지고 애가 많이 아픈가봐...


돌아온 엄마는 또 우시며 십자고상 아래서 묵주를 굴리셨다.




3. 86년 겨울

한밤중에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버지는 잠바를 대충 챙겨입으시더니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무슨 일일까?' 궁금했지만 졸린 눈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린 나는 다음날 큰오빠의 눈을 보고 소스라쳤다.


- 으악!! 오빠, 눈 왜 그래? 눈동자에 피가 맺혔어! 어머나 어떡해..!!


눈가에 피멍 드는 거야 드라마에서도 봤지만, 눈동자에 피가 맺힌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안그래도 손거울을 들고 제 눈을 살펴보던 큰 오빠에게선 술냄새가 진동한다.
한참 있다 냉장고에서 계란 한 알을 꺼내오라 시키더니 말도 없이 눈두덩에 대고 그것을 굴려댔다.

술을 마셨는데 좀 많이 마셨고, 길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치다보니 파출소로 연행됐고,
아들을 인계하러 갔던 아버지는 꼬부라진 혀로 여전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냅다
후려갈겼던 거다. 도끼눈을 뜬 경찰관을 향해 있는대로 허리를 조아리며 인사를 마치신 아버지께선 몸도 못 가누는 아들을 택시에 구겨넣다시피해서 황급히 집으로 피신시켰다............가 사건의 전말.




4. 87년 겨울

87년  13대 대통령 선거공약이 한창일 때,  중학생인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뽑히면 좋을까 이야길 했다.


- 당연 노태우지! 노.태.우~!! 노.태.우~!!



부모님 입김에서 벗어나질 못한 대부분의 아이들에겐 노태우가 인기였다.
안그래도 서글서글 인상좋은 얼굴에 대선활동 내내 인자한 미소를 띈 얼굴이 어린 여심을 흔든 모양이다.


- 머리도 되게 좋대. 와이셔츠 입고 팔 걷어부친 거 보고 나 완전 뿅갔어~ 멋져! 내 이상형!


똑같은 철부지라 아는 건 없지만, 난 또 한번 큰 오빠의 장기말이 되어 움직였다.


- 저기, 이번엔 김대중이 되야 된다더라..

- 읔, 뭐야 넌~ 웬 김대중. 완전 재수없어!! 야야, 쟤 이상해!! 혼자 뭐니.

- 김대중을 뽑아야 민주화가 되는 거야...

- 진짜 얘 뭐야. 야! 너 저리 가!


평소의 우정도 소용없이, 난 예전의 싫은 기억을 떠올리며 또다시 뎅그러니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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