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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연애부적격 2 - 내가 외면한 내 마음







 K는 이미 사범대학을 졸업해서 교원자격증을 갖고 있었지만, 묘하게 틀어진 운명때문에 동네 학원강사로 일하던 참이었다. 그는 내가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길 바랬고, 결국 그 욕심에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가 " 우리집에 가볼래? " 하며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신림동의 쪽방촌으로, 나무판자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도와 휴대용 가스렌지랑 작은 찬장만 놓여진 부엌과 그에 이어진 아주 조그만 방이 '한 가옥'이었다. 화장실은 골목 끝에 있는 이동화장실 한 칸을 주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태어나서 그런 동네에 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신 K의 어머니는 칠순의 노파로, 앞니가 두어개 밖에 남지 않은 분이셨다. 막내가 여자친구를 데려왔다고 어찌나 좋아하시는 지, 처음에 집을 보고 놀랜 나는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예고없이 들이닥친 바람에 부엌에는 라면국물이 말라붙은 냄비가 그대로 뒹굴고 있었다. 좀 추운 날씨였는데, 십년 넘게 쓴 듯 털이 죄 바스라진 밍크담요를 무릎 위로 덮고 방 안에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세 사람인데도 다리를 펼 수가 없을만큼 좁은 방이었다. 신문지 한 장을 펼치면 그 정도 넓이가 나오려나.


아무것도 대접해주지 않으시는 데도, 어머님의 웃는 얼굴이 어찌나 순박한지 나는 아쉬움이 없었다. 따로 살면서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이라, 동네 사람들 근황을 바람 빠진 발음으로 신이 나서 들려주시는 모습이 마냥 어린애같았다. 빈 손으로 찾아온 것이 어린 마음에도 죄송해서, 다음에 올 땐 좋아하시는 담배라도 한 보루 사와야지 하고 생각을 했다. 어머님은 빈 병에 물을 반쯤 담아 재떨이로 쓰셨는데, 그러면 집에 벌레가 없다고 생활의 지혜인 양 일러주셨다.


분명히 그의 어머님과 만나는 동안은 참 즐거웠는데, 작별인사를 하고 그 동네를 벗어나 서울대 담장을 거닐며 돌아오는 동안 난 마음이 아렸다. 한껏 우울해져서 내 발 밑만 보고 정신없이 걷다보니, 어느새 그 사람보다 앞서버려 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뒤처진 그를 기다리느라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잠시 서 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K도 걸음을 멈추더니 내 뒤통수를 향해 말했다.


" ○○아, 나랑 결혼하지 않을래? "


잘 몰라도 일단 대답부터 하고 보는 나였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는 너의 약점이랄 수 밖에 없는 부분만 봐왔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과연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난이든, 불확실한 미래든, 너의 신체적인 결함이든 모두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내가 배운 대로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 즉, 절대적인 진리를 따르기 위해 내 사심을 죽이고 교조적인 의미로 희생하는 것이 되진 않을까?


" 그래. "


생각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나는 생각을 멈췄다. K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내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은 웃었지만, 나는 볼썽사납게 울고 있었다. 이건 아마 기쁨의 눈물일거야 라고 애써 납득했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그는 나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 넌 나를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었잖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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