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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연애부적격 1 - 위험한 등산객




1.

대학 1학년 때 학교전체가 참여하는 봄행사로 아직도 바위 곳곳에 얼음이 낀 산을 등반한 적이 있다. 난 체육계 인간이 아닌 탓에, '행동' 해야하는 자리에선 늘 뒤떨어진다. 1학년 A조로 출발한 내가 일행을 죄다 잃어버리고 뒤에서 낑낑대며 산을 오를 때, 4학년이었나 대학원생이었나..  굵직한 인상의 남자선배 한 분이 나를 이끌어주셨다.


꼭 코흘리개 여동생을 데리고 가는 모양새로 그 분은 자신의 등산 스틱을 내 쪽으로 내밀어주셨고, 난 그 끝을 꼭 쥐고 헉헉대며 따라갔다.  스틱으로 연결된 그 사람과 나. 내가 잘 따라오는지 가끔 뒤돌아봐주면서, 그는 나를 1학년 A조에게 인계하기 위해 열심히 걷고 있었다. 초면이었지만 서먹하지 않게 간단한 대화가 줄곧 이어졌다.


'어머.. 이 사람 웬지 믿음직스럽고 멋있다.. '


슬슬 내 눈이 하트로 변하는 참이었다. 그러다가 커다란 바위를 넘어가야하는 지점이 나타났는데, 착지해야 할 지점엔 여름내 시냇물이 흘러 반질반질해진 통바위가 놓여있었다. 바위를 넘어 바위인 것도 모자라, 내려설 자리엔 낙엽낀 얼음이 깔려있어 한 눈에 봐도 무척이나 미끄러워보였다.


" 내가 여기서 받아줄테니까 눈 딱 감고 뛰어내려요. "


먼저 내려간 그 사람이 나에게 팔을 뻗었다. 내 뒤에 있던 학생들이 "오오오~" 놀려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창피하지만 도저히 도움을 안받고는 내려갈 용기가 없어서 시키는 대로 그의 두 팔을 잡고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미끄러운 바위 위에 서있던 그가 휘청~하더니 나를 붙잡은 채로 미끄러져버렸다. 엉덩방아를 찧은데다 곧바로 내가 안기는 바람에 그대로 바위에 누워버린 그 사람. 역시 그 위에 엎어져버린 나 때문에 두 사람은 그렇게 부둥켜안고 바위 위에 누워버린 형태가 되버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학생(그 분의 친구인 듯) 하나가 짖궂게 눈을 흘겼다.


" 이렇게 사랑이 시작되는 거야. 하하하~ "





2.

가을이 되어 1학년 야유회로 수락산 등반계획이 잡혔다. 봄의 등산 이후론 언제나처럼 산 근처엔 가지도 않았던 나는 또 한번 겁을 먹었다.


" 딴 데 가면 안돼? 롯데월드 가자~ "
" 다수결이잖아. 까불고 있어.. -_-+ "


우리 조는 편입생 2명, 신입생 8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여학생은 나 하나였다. 조편성을 하고, 각자 준비물을 배정하고, 스케쥴표를 받고 하는 사이에 결전의 그 날이 왔다. 아침 일찍 모여 뜨거운 커피를 나눠마시고 출발했다. 같이 수업을 받지만 솔직히 얘기는 별로 못해 본 ○기라는 애가 있었는데, 같은 조라는 명분으로 함께 움직이다보니 어쩜 그렇게 농담을 잘 하고 사람을 웃기는 지, 가는 내내 배꼽을 잡느라 힘들었다.


툭하면 '허허~'하고 웃는 인자한 인상의 ○우 오빠가 ○기랑 나랑 투닥거리며 말장난 거는 걸 보고 " 너네들 정말 귀엽다아~ 너네들 정말 웃겨~ " 하고 만담커플로 인정했다. 그땐 나도 상대방이 맘에 들면 감추질 못하고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던 순진한 시절이라, 일부러 ○기를 괴롭히듯이 말을 걸고 지지않으려 뒤따르는 그의 반응에 좋아 죽는 시늉을 했다.


산자락에 있을 때는 ○기 덕분에 그렇게 만사를 잊고 신이 나서 산을 올라갔는 데, 산 중턱에 이르니 아니나다를까 자꾸만 일행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뒤쳐지는 건 무섭지만, 그보다 먼저 숨이 턱에 닿기 시작하니 별로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질 않았다. 그러자 우리 조에 있던 ○수 오빠가 내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때까지 있는둥 마는둥 했던 희미한 존재였다.


" 내 손 잡을래? 꽉 쥐지 말고 가만히 잡으면 힘들지 않고 올라갈 수 있어. "



가벼운 키스처럼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서로의 손에 땀이 밸 필요도 없을 정도로 스치듯이 잡은 손이었다.  이 오빠는 이런저런 말도 없었다. 오로지 손만 내준 것인데도 나는 마음이 편해지고 괜히 기분이 두둥실 떠올라 등산가는 길이 그저 산책가는 길같이 느껴졌다.


정상에 오르니, 벌써 도착한 조원들은 버너에 물을 끓이는 중이었다. 오는 도중 하도 군것질을 해서 별로 배가 고프지도 않고, 하산하면 당연히 맥주집으로 향할 예정이라 그 물에다가는 커피믹스를 탔다. 코펠 구성품 중에서 컵이고 국그릇이고 할 것없이 아무 그릇에나 부어서 나눠마시고 잠시 휴식했다가 하산준비를 했다. 오는 길을 비교적 편한 길로 택한 탓에,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니 조심하라고 한다. 나는 당연한 듯이 ○수 오빠에게 다시 손을 청했다.


" 같이 갈까? "


당신만 믿고 있다는 내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웠나. 내려가는 길엔 오빠가 첫사랑 이야길 해줬다. 아직도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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