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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돈의 추억 - 세번째







아버지는 일년 반만에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돈벌이가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일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일년째 되던 때였지만, 돌아올 차비를 마련하느라고 반년을 더 머무르셨던 것이다.



공항에서 종일 목을 빼고 기다리던 삼촌에게서 드디어 전화가 왔다.
" 누나, 매형이 왔어요! 지금 곧 갑니다!"



돈을 벌지 못했노라고 하였지만, 아버지가 귀국하시면서 사들고 오신 기념품들은 공항에서 타고 오신 택시의 트렁크와 뒷좌석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이슬람 무늬의 미니 카페트들, 블랙앤데커 진공청소기, 소니 워크맨, 유명 팝가수들의 테입, 외제 화장품들과 진귀한 열대 과일들..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생활을 하다가 오신 것일까.
아무튼 가족과 친지들은 모두 모여서 아버지가 하나둘 꺼내시는 선물을 구경하며 순진한 찬탄을 터뜨리고 있었다.



국내에 계실 때 우리가 임신 9개월이라며 놀려댔던 뚱뚱한 아버지는 간 곳 없었고, 아버지는 마른 몸매의 구릿빛 사내로 변해있었다. 어머니는 얼마나 고생을 했으면 저렇게 살이 빠질 수가 있느냐며, 처연한 눈길로 아버지를 살폈다.



그러나 변한 것은 몸매 뿐이 아니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시는 신경질적인 아버지.
귀국 다음날, 나에게 만두를 사줄테니 시장에 가자고 하시던 아버지는, 내가 시장 입구의 가장 가까운 만두집에 들어가 "만두 주세요~"하고 외친 것을 갖고 그날 저녁 엄청나게 화를 내셨다. 맛없어 보이는 집이었는데 하필 그집에 들어가 만두를 팔라고 했냐며.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상황이지만, 그땐 참 상심했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아버지는 다시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셨고, 역시나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셨지만 아예 안계실 적보다야 살림은 나아졌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다행히 중고등학교 시절은 한번도 수업료를 밀린 적이 없다.
아버지께서 수업료를 벌어다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다니던 성당에서 나를 '가난한 가정의 우등생'으로 선발해 준 덕분에, 성당의 장학기금인 [000 (기부자의 영세명) 장학금]의 수혜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의 일화를 소개하자면, 학년 별로 한 명씩 뽑아서(당시엔 1년간 지급하게 되어있었는데, 나는 여러 교우님의 주선으로 6년간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성당 내 작은 교육관에서 신부님에게 장학증서를 전달받는 행사가 있었다.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이니 너나없이 남루한 복장을 하고 참석을 하였으나, 나는 품이 넉넉한 세무점퍼를 입고 있었다. 내게 장학증서를 수여하시며 신부님께서 한 마디 건네신다는 것이, "와. 좋은 옷을 입었네? 하하" 하며 등을 두드려 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얼굴이 아예 홍당무가 되어버렸는데, 그 점퍼는 동네 세탁소 아주머니가 손님이 찾아가지 않는 옷이라며 우리 엄마에게 애들 입히라고 넘겨주신 옷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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