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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돈의 추억 - 네번째






몇 년 전, 큰 오빠와 대화를 하다가 이런 이야길 했었다.




"오빠, 난 어린시절 생각하면 정말 짜증이 나. 그때 생각하면 마음의 안정이 다 깨져버려.
아마 평생동안 그 기억만으로 우울할 것 같아."

"그래..? 난 옛날 생각하면 재미있는데. 큰 외삼촌이 ** 이랑, *** 선물해주셨던 기억도 나고."




난 오빠의 대답에 꽤 큰 충격과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내가 암울한 시각으로만 반추하던 시절을 오빠는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다니.



나에게는 오빠가 두 분 계신데, 큰 오빠는 63년 12월생이고, 작은 오빠는 67년 10월생이다.
내가 74년 10월생이니 큰 오빠와는 10년 차이,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11살 차이가 나는 셈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일이긴 하지만, 나중에 엄마나 친지들에게 들은 오빠들의 성장기엔
참으로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엄마는 아들을 삼년 터울로 둘이나 낳고 나서, 건강이 나빠져 거의 자리보전을 하는 신세가 되셨다고 한다.
결국 큰 오빠는 큰 이모가, 작은 오빠는 작은 이모가 데려가서 키우게 되었는데,
큰 이모는 새색시 시절에 이모부와 6.25전쟁으로 사별하고 전쟁미망인이 되어 올망졸망한 딸 둘을 데리고 살며
국가가 주선해 준 직장(동아출판사)에서 책 제본하는 일을 하고 계셨고,
미혼이었던 작은 이모는 영어와 타이핑을 배워 미군부대 사무원(타이피스트)으로 근무하고 계셨다.



큰 오빠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상태에서 맡겨져, 일곱살의 나이로 미아리 큰 이모댁에서 돈암초등학교까지 1시간을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큰 이모가 출근하시고, 오빠보다 고학년이었던 사촌언니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학교를 일찍 파하고 돌아온 큰 오빠를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모는 출근하시기 전에 밥 한공기를 쪽마루에 놓인 찬장에 넣어두시곤 하였는데, 그 밥이 오빠의 점심이었다.
당시 큰 이모댁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날이 더우나 추우나 찬장에 넣어두는 방법밖엔 없었다.



사촌언니들 중에 맏언니가 돌아오면 언니가 해주는 밥으로 저녁을 해결하는 식이었는데, 어느날 맏언니가 돌아와보니 오빠가 찬장 앞에서 엉엉 울고 있더란다.
왜 울고 있느냐고 물어보니, 오빠는 우느라 지쳐서 말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찬장을 가리키더라는 것이다.
그제야 찬장을 들여다본 언니는 오빠의 점심밥에 개미가 새카맣게 꼬여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어린시절부터 저 혼자 알아서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큰 오빠와는 달리,
작은 오빠는 어린시절 사진을 보면 귀한 집안의 외아들같이 고운 옷에 통통한 뺨을 가진 동글동글한 어린이의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군부대에서 일하시던 작은 이모가 PX에서 흰 우유며, 미제 과자며, 알록달록한 옷들을 사다가 입혀주고 먹여주며 정성을 다해 보살폈던 것이다.



작은 이모는 훗날 미군 군속과 결혼하게 되어 미국으로 출국하게 되었는데, 그간 키우다시피 한 작은 오빠를 부둥켜안고 며칠 밤낮을 우셨다고 한다.
그렇게 조카를 사랑한 이모인데, 정작 당신은 첫아이가 자궁외 임신이 되어 평생 아이를 낳지 못하셨다.



당시 우리집은 수유리에 있었는데, 역시 6.25로 혼자되신 외할머니가 아픈 딸(어머니)을 보살피고 계셨다.
아버지는 세들어 살던 집에 방을 한개 더 얻어 화실로 쓰시면서 장모님과 함께 아내를 돌보셨다.



가끔 큰 오빠나 작은 오빠가 엄마를 만나러 올때마다 사진을 몇 장씩 찍어두셨는데,
그 사진들을 보면 당시의 고생담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들 해맑고 행복한 웃음들을 짓고 있다.
아마 떨어져 지냈던 얼굴들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더이상 바랄게 없던 시절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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