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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돈의 추억 - 두번째






내가 국민(초등)학교 5학년일때,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신다며 사우디를 향한 출국준비를 하셨다.
당시엔 몰랐지만, 출국자금으로 아버지는 사채업자 비슷한 아줌마에게 천만원을 빌리셨다고 한다.
(당시의 1000만원은 지금에 비하면야 당연히 큰 돈이다.. 지금도 목돈이지만..)



우리 아버지는 건설노동자가 아니다. 그림을 그려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화가였다.
아무리 초등학생이지만, 중동에 가서 그림을 그려 돈을 벌어온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아무튼 아버지는 지금 떠나야 돈을 벌 수 있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하셨다.
아버지가 출국하시던 날에, 우리 가족은 김포공항에 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족이 모두 참석한 [가족사진]을 한 방 찍고, 아버지를 배웅했다.



그때부터 심상치않은 생활고가 시작되었다.
아버지에겐 소식 한 자 없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큰오빠는 매 학기마다 제적 시한 하루를 남기고 외가 친지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등록금을 마련했으며, 나는 당시 1년에 6400원이었던 육성회비(국민학교 수업료)를 내지 못해 담임선생으로부터 수차례 독촉을 받다가 이웃으로부터 간신히 돈을 꾸어온 엄마 덕분에 더한 수모를 모면하였다.



대학시험에 떨어지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던 작은 오빠는 막내외삼촌의 주선으로 방송국 엑스트라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수입이 하루에 9700원이었다. 하루라는 건 말 그대로 꼭두새벽부터 자정까지를 말하는 거였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하도 사고를 치고 말썽을 피워 "저놈은 자식이 아니라 웬수"라는 말을 들었던 작은 오빠가 우리를 먹여살리게 된 것이다. 작은 오빠 월급날이 되면 우리 모두 마음이 푸근해지던 기억이 난다.



나는 고3때까지 방 2개짜리 월세에 살았는데,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한 집에 그렇게 오래 세를 들어 살았다.
아버지가 출국하기 전부터 월세가 밀려있던 상황이었는데, 출국하신 이후로는 한번도 월세를 내질 못했다.
그런데도 거리에 내앉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 자비로운 집주인을 만났던 거다.



훗날의 이야기지만...아버지께서 귀국하고도 여전히 우리의 상황이 좋아지질 않아서 당시의 밀린 월세를 갚지 못하고 지낼 때, 주인은 어느날 우리를 찾아와 그간의 월세를 탕감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대신, 이후로는 밀리지 말아달라며.
지금 그분은 파파 할아버지가 되셨겠지만, 당시 한 집에 살면서도 어린 나에게 월세와 관련된 이야길 해서 어린 마음을 해한 적이 없는 분이다. 참으로 고맙기 그지 없다...



아무튼 아버지는 그렇게 1년이 좀 넘는 기간을 간혹 전화만 주셨을 뿐, 송금소식은 깜깜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에 우리들은 잘도 병이 났다. 큰오빠와 나는 지독한 아토피로 손톱이 헐 정도로 몸을 긁어대며 괴로워했고, 나는 자주 앓던 편도선염이 심해져서 어느 겨울날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편도가 부어올랐다.
부어오른 편도가 목의 절반높이까지 늘어졌을 정도이니, 거의 초주검의 상태였다고 기억한다.



병원비는 당연히 없었고......엄마는 굉장히 뜨거운 죽을 끓여서 내 입에 흘려넣어주었다.
삼킬수는 없었기 때문에 목을 뒤로 젖혀 흘러들어가게 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침이 고여도 삼킬수가 없어서 베개 위에 신문지를 두껍게 깔고 그냥 흐르게 내버려두었던 기억도 난다.
어찌어찌 낫기는 하였으나 난 한달 남짓 학교에 가질 못했고, 그 시절의 후유증으로 허스키한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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