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신 후 집안에 여러가지 풍파가 있었고, 다음해 6월에는 온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화실에서, 큰오빠는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구해서, 작은오빠는 일본에, 나는 친구가 사는 용산구 원효로의 자취방에 얹혀살게 되었다.
학비 문제로 휴학을 신청했다가, 급작스럽게 돈이 구해져 일주일만에 기적적으로 복학한 나는 드디어 2학년이 되었지만, 그 돈이라는 게 같이 사는 친구 (여상을 나와서 작은 회사의 경리로 일하고 있던 내 중학교 동창이다) 에게 융통한 물건이라서 얼른 갚아주고 새학기 돈도 벌어둬야 했다. 친구네 집 근처 편의점에서 야간알바를 하면서 틈틈이 볼펜을 쥐고 생활정보지를 읽어내려가곤 했는데, 어느날 광고에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학원강사 자리가 나왔다.
전화로 면접을 보기로 선약을 하고 찾아간 곳은 마포구 아현동의 한 보습학원으로, 중학생 대상의 수학강사를 구하는 중이었다. 아이를 가르쳐 본 경험이 없음을 솔직하게 밝혔으나, 노련한 이미지의 원장님께서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만 몇가지 묻고 나를 즉시 채용하였다. 학원에는 중3은 없고 중1과 중2 학생만 다니고 있었으므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2시간씩 수업을 하기로 하였다. 학생수 대비 성과급을 주는 것은 아니었고, 계약한 봉급만 받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날부터 저녁이면 중학교 수학문제집을 놓고 매일같이 풀기 시작했다.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의 문제였으므로 경험이 전무한 나로써는 만만히 볼 일이 아니었다. 친구집에 가끔 놀러오는 다른 동창녀석 하나는 내가 작은 상을 펴놓고 수학문제집을 풀고 있는 것을 보며 조금 부러운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집안의 권유로 여상을 나와서 세무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친구였다. 집안의 형편을 따지자면 상업학교를 나와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이 나한테나 어울릴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우린 서로를 부러워하는 처지였다.
학교를 가서 수업을 마치면 간단히 점심을 먹고 도서관 지정석에 박혀서 학과공부를 하거나 수학강의를 예습했다. 시험기간이 아니면 늘 텅텅 비어있는 도서관에 나 혼자 앉아있는 것을 눈여겨 본 어느 대학원생 선배 하나가 매일 아침 작은 우유 하나를 내 책상에 살짝 놔두기 시작했다. 이건 딴 맘을 품고 그러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배려였다. 우리 학교는 매우 소규모의 집단으로써 누구네 사정이 어떠한지는 소문이 나버리면 금새 퍼져버리는 그런 곳이었다. 성적이 과히 좋은 편이 아닌 나에게 장학금을 양보하는 학생이 있을 정도로, 난 불우한 방면으론 나름 유명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다지 의지가 굳거나 목표가 확실한 인재는 아니어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늘 도망가고 싶어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같은 학번의 여학생 중에는 모피코트를 입고 자가용을 굴리며 학교를 다니는 학생도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어린 마음에 상대적으로 패배의식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 주제에 책임감은 있어서 (어떻게 보면 자만심인거지만) 학교에서, 학원에서, 친구집에서 늘 제 몫을 해내어 폐를 끼치지 말아야된다는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학원생활은 재미있다기보다는 고군분투였다. 아이들은 대개 어려운 가정의 아이들로, 부모님들은 그냥 집 가까운 곳으로 택해서 이 학원을 보낸 것일뿐, 크게 성적이 오르길 기대하는 타입들이 아니었다. 아이들 또한 예쁜 여자애 하나를 이지메하거나, 학원이 끝나면 몰려다니며 어디 가서 놀 궁리를 하는 녀석들이 대부분으로, 집에서는 학습지 하나 정도 배달받아 풀고 그 밖에는 이 학원에 나와서 대충 앉아있다 가는 것이 공부의 전부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할렘가의 아이들을 모아놓은 수준이었으나, 원장의 열의는 보통이 아니었다. 본인 역시 학원강사로 출발한 원장님은 학원사업을 자기 평생의 갈 길로 정해놓고, 그 첫 단추가 될 이 학원을 어떻게든 성공적인 수익모델로 만들기 위해 다각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었다.
햇병아리같은 나를 싼 값에 채용하고서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격려와 방향성 제시를 아끼지 않던 사람이 바로 원장이었다. 아마 그 당시의 나는 크게 미움을 받는 타입이 아니었던 건지, 때로는 분에 넘치는 관심을 받으며 강사로써 갖춰야 할 여러가지 마인드에 대해 개인교습을 받았다. 나도 자신감을 잃지 않는 범위 안에만 있으면 타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하는 고집은 있었으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그런 부분들이 빛을 보았는지 아이들도 조금씩 예의를 갖춰가고, 성적이 크게 나빠지진 않았던건지 다른 학원으로 이탈해 가는 인원도 발생하지 않았다. 원장은 내가 잘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한 학기 가량 그런 생활을 하였는데, 갑자기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전날까지도 징후를 못 느꼈으나, 어느날 갑자기 평소의 체력이 발휘되질 않았다. 그 이후로 쭉 비슷한 상태였다. 몸 속의 어딘가가 계속 아프고, 피곤하고, 힘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밤에 심하게 몸을 뒤집어가며 고통을 호소해서 결국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 가게 되었는데, 병명은 [결핵]이었다. 결핵이라 하면,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해대다가 손수건에 잔뜩 묻은 피를 보고 기함을 하는 그런 류의 폐결핵밖에 몰랐지만, 병원의 설명에 따르면 결핵균은 암세포처럼 몸의 어느 장기에나 발병하는 거였다. 치료도 급하지만 힘든 일을 중단하라는 권고가 있었고, 한밤중에 연락을 받고 놀래서 뛰어오신 아버지는 갑자기 그만두게 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러 나대신 학원을 찾아가셔야 했다.
그 후론 항생제주사를 맞으며 6개월 정도 요양을 했다. 머물던 곳이 여러곳이라서 어디서 가장 오래 정착했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일을 쉰 덕분인지 건강은 많이 좋아졌지만 방향을 잃어버린 의욕은 영 회복이 되지 않아서, 대학은 2학년 2학기를 마지막으로 자퇴를 선택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되기 전 1년간은 성북구 종암동에서 역시 중학교 수학강사로 생계유지를 하였다. 그다지 열의를 갖고 지냈던 기간은 아니고, 그냥 입에 풀칠이나 하겠다는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승의 날에 (엄마가 일하는 공장에서 만드는) 싸구려 블라우스를 한벌 얻어갖고 와서 던지듯이 건네주고 휙 도망가버린 남학생을 가끔 떠올린다. 자격미달의 선생이었지만, 내게는 모두 귀여운 학생들.. 이었다. 그때 가르친 중학생들은 아마 지금쯤 서른살 즈음 일거다. 제 몫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젊은이가 되어있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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