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UME - 두번째 알바

학부 신입생 시절은 어디 가서 추억이랍시고 떠들어대기에는 너무나도 창피한 시절이다.


학교 앞 까페 (이름이 '킬리만자로'였다)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단짝친구들과 같이 죽치거나, 돈이 없으면 교내 매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용돈이 좀 두둑하거나 선배가 쏘는 날이면 호프집에서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퍼마셨다. 대충대충 넘어가거나 자체휴강(!)하는 날도 잦아서 1학기 평균총점이 2.5였고..결국엔 필수과목 중에 한 과목이 빵꾸가 났다.


빵꾸난 과목이 외국어였다. 재수강을 면하려면, 방학동안 교재 한권을 통째로 5번씩 노트에 옮겨쓰라는 담당교수님의 특별과제를 받았다. 역시나 같이 놀던 친구도 함께 빵꾸가 나서, 문제의 심각성도 모르고 방학동안 여학생 휴게실에 모여 사이좋게 숙제를 하기로 해놓고선, 정작 만나면 잔디밭에서 뒹굴고 놀거나 단골노래방에 처박혔다. 어쨌든 약속한 날짜에 숙제를 내러가니, 교수님은 해외에 가시고 안계셨다. '직접 뵈면서 드리면 효과가 좀 있을텐데' 싶었지만 숙제만 맡겨놓고 걱정에 휩싸여 되돌아왔는데, 후일에 교수님을 뵈었더니 너무 열심히 해와서 외려 미안했다고 말씀하셨다.


그 겸손하신 처사에 어쩐지 감동을 받아서, 2학기 때는 뭘 해도 열심히 하자고 결심을 했다. 그렇게 모처럼 맘잡고 있는데, 2학기 등록금을 내는 과정이 순탄하지가 않았다. 무능한 내가 당장에 어떤 해결책을 마련할 수가 없는 일이어서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학비를 맞춰서 넣고는, 이젠 스스로 내 살 길을 모색해야지, 지금처럼 방만하게 지내서는 안되겠다는 즐겁지 않은 각성을 했다. 대학레벨이 낮아서 과외자리를 찾아본다는 것은 솔직히 하늘의 별따기였다. 일단은 학교와 집의 중간지점에 있던 (내가 버스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갈아타던 그 지점)  커피숍에 알바로 취직하였다.


처음에 패스트푸드점에서 알바를 해본 경험이 있다보니, 이런 접객업은 내겐 무지 편했다. 다만 돈이 잘 안 벌려서 그렇지, 예쁘게 화장하고 서있다가 주문받고 음료만 만들어서 내어주면, 손님이 알아서 갖다마시고 알아서 치우고 간다. 일주일 정도 일해보니 누워서 떡먹기였다. 시급은 전보다는 높아서 2000원 쯤이었던 것 같다. 1층과 2층이 모두 커피숍이었는데, 처음엔 1층에서 잠깐 설겆이 시다바리를 하다가, 금새 2층으로 진출했다. 2층에서는 나 혼자 홀을 관리하며, 주문을 받으면 인터폰으로 1층에 전달을 하고, 라면상자곽 만한 승강기로 음식물을 올려받는다. 커피나 음료 외에 조각케익도 팔았다.


어느날, 우연히 고교동창생 하나를 만났다. 이대에 갔던 친구인데, 학부친구들과 우르르 몰려왔다가 나를 보고 반가워했다. 아무래도 이런 알바를 하는 내가 우습게 보이겠거니 싶어서 조금 주눅이 든 상태로 주문을 받았는데, 14명 분의 주문을 가만히 듣고 즉시  "모두 합해서 00000원 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나를 향해 탄성을 질렀다.
" 와아~~ 너 증말 대단하다~~ !! "
늘 하는 일일 뿐인데  감탄을 아끼지 않는 그녀를 보니, 머쓱하긴 해도 적이 고마왔다.


어쩌다 점장님께서 일을 마친 후에, 알바들을 데리고 가까운 호프에 가서 생맥주에 골뱅이무침을 사주실 때도 있었다. 대개 다같이 참석했지만, 유독 한 사람은 빠지곤 했다. 초저녁시간만 근무하는 언니 하나가 한번도 자리를 같이 하지 못했다. 얼굴은 수수하지만 못생긴 편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몸매가 살인적으로 예뻤던 언니였다. 나보다 2살인가..많았는데, 그 언니는 남자친구때문에 거의 대외적인 활동이 불가능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 남친이 [의심]이 많았던 것이다.


같이 일하던 오빠가 "야, 너 걔랑 헤어져. 그런 자식이 결혼하면 의붓증 되는 거야. 암만 봐도 걔 증말 심한거 같어~" 하고 조언하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언니는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다. 남의 말만 듣고 덩달아 걱정하는 나에게, 언니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양담배 한 개를 꺼내들면서 말했다.
" 걔가 집안이 좋거든. 형들이 다 의사에, 엄마아빠도 부자야. 집이 청담동이라니까. 나 걔랑 결혼해야돼. 애가 좀 거칠긴 한데, 그래도 나만 좋아하니까 다행이지 뭐. 내년 쯤엔 결혼하려구. 걘 나 담배피우는 것도 몰라. 나도 알아서 잘 하거든. "


형들이 의사인 건 알겠는데, 대체 그 남자는 뭘하는 사람인지 물어봤다. 지금은 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언니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집에서 하는 일을 물려받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언니가 검정색 롱 드레스입은 모습이 너무 예뻐서 홀딱 반했고, 재를 털 때 담배를 재떨이에 살살 비벼서 마치 연필처럼 뾰족하게 만드는 것도 멋있어 보여서 언니가 좋았다. 그런 언니가 저런 이상한 남자한테 목을 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언니는 굉장히 신념에 차 있었으므로 함부로 내 생각을 떠들어댈 수는 없었다.


남자알바생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늘 눈에 거슬려하던 그 언니의 남친은, 어쩔때는 매장에서 장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 한 두달 쯤 흘러 언니가 일을 그만 두었고,  그만둔 언니 대신 뽑힌 새 알바생은 서울예전 영화과의 여학생으로, (세상에) 그렇게 예쁜 사람은 난생 처음 봤다. 말그대로 인형이었다. 바비인형. 손님이고 직원이고 여성이고 남성이고간에, 몰래 슬쩍슬쩍 훔쳐보다가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릴 수 밖에 없는 감히 올려다보기 힘든 미인이었다.


어쨌든 나도 그로부터 얼마 못가 그만 두었는데(추석연휴동안 못 쉰다고 해서 점장님께 대들었다가 짤렸다. 재수 옴붙었는지, 그만두면서 받은 잔급 14만원을 바로 그 다음날 소매치기당했다),  3-4년 후에 길을 걷다가 어디선가 본 듯한 여인이 내 곁을 스쳐가길래 얼른 멈춰섰다. '누구더라..' 하는 새 그녀는 멀어져갔지만, 아, 그 언니, 의심많은 남친을 사귀었던 그 언니였다. 언니 말대로라면 벌써 결혼했어야 할 텐데, 추레한 차림새나 낯설만치 무거운 걸음걸이가 아무래도 [연애중인 여자] 같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