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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나는 나고, 너는 너



고모댁에 놀러갔다가, 환갑이 지나신 고모가 눈시울 붉히시며 옛 이야기 해주시는 것을 넋을 잃고 들었다.



- 야, 니 작은 고모가 얼마나 못 됐는지 아니? 걔가 교회 집사잖아. 교회에 행사 있으면 꼭 일 도와달라고 나를 불러. 그래서 그 날도 새벽부터 도와주러 공항동까지 갔단다, 아침도 못 먹고. 근데 고모가 당뇨가 있잖아. 배가 고프면 당이 떨어져서 어지럽고 아주 죽어. 근데도 점심때까지 부려먹고 그렇게 음식이 쌓여있는 데, 뭘 좀 먹으란 말도 안하는 거야, 그 계집애가. 그래서 내가 그랬지. "얘, 00아, 나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어지럽고 몸이 안 좋은 데, 어디 가서 국밥이라도 먹고 오자." 그랬더니 얘가 바쁜데 어딜 가자고 하냐고 펄펄 뛰고 그래서, 결국 나 혼자 밖에 나가서 5천원 주고 백반 사먹었다니까. 으휴, 나쁜 년. 걔가 그렇게 못된 년이야. 내가 밥먹으면서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아냐? 천하에 죽일 년...



고모가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 빨간 쓰리세븐 책가방도 사주셨던 작은 고모가 설마 저리도 모질게 하셨을까 싶지만, 아무튼 그 비슷한 일이 있었나 보다.



- 어떡하니.. 고모 울지 마.. 그러면서도 작은 고모가 고모 사정을 제일 잘 알더라.. 마음 풀어..


- 됐어! 우리 **이(고모 아들)가 뭐라는 지 알아? 그런 대접 받으면서도 왜 작은 고모를 만나냐는 거야! 이제 그 집하고는 왕래하지 말라더라. 나도 이제 걔하곤 아주 끊을 거야.


- 에휴.. 왜 그랬데, 작은 고모는. 작은 고모가 좀 이기적인 데가 있긴 하지..


- 당연하지! 너 말 잘했다. 걔가 얼마나 이기적인데! 교회 다닌답시고 아주 바깥에서나 실실거리지, 동기 간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년이야!


- 그래도 그러지 말어.. 큰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가 어디 고모 한번이라도 챙기데? 차라리 자매 지간이 낫지. 고모랑 작은 고모 둘 뿐인데 고모가 다 용서하고, 작은 고모랑 잘 지내. (위로하는 척, 순 이간질만 시키는구나..)


- 하긴, 니 큰 아버지도 여자를 직싸게 고생시켜서 도망갔잖아. 큰 올케가 애기 낳고 이틀 있다 화판 머리에 이고선 그림 팔러 나갔어~ 한 겨울에. 그 언니가 아주 고생 많이 했지. 그래가지고 나중에 도망간 거 아니냐.


- (왜들 이 모냥이래..-_- ) 그랬구나.. 난 첨 듣네..


- 그래도 둘째 올케(우리 엄마)는 나한테 참 잘해줬지. 니네 외할머니가 날 아주 이뻐했어. 수유리 살 때, 니네 엄마가 몸이 아파서 내가 니 기저귀 빨래해주러 가고 그랬거든. 너네 외삼촌하고도 친해져서, 내가 '오빠, 오빠' 하고 따라다녔다니까. 그래서 용이 오빠(나의 큰 외삼촌)가 **대학교 선생 할 때, 나 불러서 거기 교수식당에서 밥도 사주고 그랬다. 진짜 니네 외갓집이 참 좋은 사람들이야. 근데 둘째 오빠(우리 아버지)는 내가 환갑이 넘었는데 여지껏 이년아,저년아 하고 부른다니까.


- 그랬어..? 아빠한테 말씀 좀 삼가하시라고 할께. 아빠도 주책이야~ ^^;;


- .... 차 다 마신거야? 그럼 얼른 옷 입고 나가자.


- 어딜 가게..?


- 여기 이마트 가자. 고모가 너 뭐 먹을 걸 좀 사줘야지. 고기랑 필요한 거 사줄테니까, 집에 가서 해먹어.



어느새 눈물이 마른 고모가 외투를 입고 나갈 채비를 하셨다. 자신이 상처받은 건 상처받은 거고, 조카는 조카대로 걱정해주는 생뚱맞은 고모의 마음에 이번엔 내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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