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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술이다 4





(완벽히..는 아니지만) 술을 끊었더니, 적은 양의 술을 마셔도 쉬이 맛이 간다.



열흘 전의 일이다. 마트에서 장을 보는 데, 기네스 흑맥주의 시음행사가 있었다.
앳되고 사근사근한 얼굴의 도우미가 내게도 컵을 건네며 "한번 드셔보세요~" 한다.
평소엔 시식코너 따위엔 눈도 안 돌리는 데, 그날은 직전에 들렀던 코너에서 도우미가 내 뒤를 조용히 따르더니 
이것저것 어드바이스도 해주고 사은품도 챙겨줘서 살짝 감동을 받은 상태였다.



종이컵(..것도 소주잔)에 반만큼 따라놓은 검은 술을 마셨는데, 순간 몽롱~해졌다.
고걸 마시고 취기가 돈 것이다.
그날의 행사상품은 기네스 캔 3개와 로고컵 하나가 멋진 종이상자에 담겨 8천원대. (기네스 250주년 기념이란다)

" 오늘 구매하시면 이렇게 컵도 나가요~ ^^ "
" 난 컵은 필요없고, 술을 원하는데요.. 후후 "

'씨도 먹히지 않을 소릴 한다..' 생각하면서도 딴지를 걸었다. 그런데..

" 어머! 그러시면 제가 시음용 캔을 하나 더 끼워드릴게요!! "



오호.. 그럼 캔 4개에 컵 하나가 되는 거군. 얼떨떨하게 웃다가 결국 카트에 실었다.
사은품인 컵은 제법 두꺼운 재질이라, 전에 받아온 '2X' 컵의 세게 쥐면 금방 깨질듯한 느낌과는 달랐다.
집에 돌아와 사온 것들을 냉장고에 정리해놓고, '언제 기분 좋은날 마시덩가..' 하면서 잊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KBS2에서 재방송중인 교양프로그램을 보다가 채널을 돌렸더니...




[노무현 前 대통령 사망]




그 날은 블로그에 뭔가 적어올린 날인데도, 뭘 하고 보냈는지 기억도 없다.
자정이 지나고 일요일이 되어서야 뭘 좀 먹자고 냉장고를 열었다가
그때 산 기네스맥주를 발견했다.
밤새 울고, 마시고, 울고, 마시고..
안주도 없이 두 캔을 마시고 설풋 잠이 들었다가, 눈이 떠지면 또 술을 마셨다.



결과적으로 월요일부터 내리 이틀 동안 속병이 나서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그런데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거리엔 국화를 들고 한마음이 된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그 때 내가 붙들고 울 수 있었던 대상은 빈 맥주캔 뿐이었다.



당신과의 이별주는 끝내 독작으로 사라졌다.
흑맥주라서 그렇게 맛이 썼을까. 고독을 절감해서 그리 썼을까.
바보, 당신은 영정 앞에 놓인 술을 누구와 마셨나요?
당신도 벗이 없어 혼자 마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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