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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

2/5 당신, 나에게 오지 않겠습니까?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주문을 외웠다.

'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일으켜 꽉 안아줘. 내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키스해 줘. '



단언컨데, 아무라도 상관없었다.
작고 비쩍 마른 저 대학생이든, 몇 가닥의 머리카락으로 대머리를 커버한 바코드형 헤어스타일의 저 아저씨든.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외롭고 불안했다.
센세이셔널한 뭔가가 내게 이루어졌으면, 그것도 사람 많은 곳에서 벌어져 버린다면,
게다가 세리모니가 끝난 다음엔 잠시나마 조롱과 경멸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소원은 끝이 없었다.



한강은 안개가 자욱해서 건너편 다리조차 보이질 않고,
내려야 했던 역은 지하철공사와 맞물려 보도가 비포장인 상태라 7센티가 넘는 하이힐 굽은 툭하면 휘청거렸다.
내가 향한 곳은 카센타와 공업사가 잔뜩 밀집되어 나열된 거리.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기름묻은 작업복과 야전잠바 차림의 사나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나오는 판이다. 마음 속으로 침이 흘렀다.
' 나를 좀 안아줄 수 없겠습니까? '



을씨년한 동네에 생소한 스커트 차림의 여자가 나타나서인가. 그들은 어깨를 스치며 힐끗 나를 봐주었지만, 그 뿐이다. 이 가게 백반을 먹을까, 저 식당 백반을 먹을까 아까부터 하던 의논을 계속 한다.
썬팅지를 안으로 발라놓은 공업사의 유리샷시문은 다행히 내 얼굴을 깨끗하게 비추어준다. 어딘지 화난 얼굴. 굳이 찌푸리지 않아도 " 건들지 마! "의 포스가 대단하구만. 이러면서 속으론 딴 소릴 했단 말이지.
배란기가 다가온 탓일거야. 호르몬의 문제야. 미칠 것 같지만, 사실 미치지는 않는다구.



돌아오는 길에 헌책방을 들렀다.
일곱 권의 책을 척척척 골라서 계산대에 올려두니, 초로의 주인아저씨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한다.

" 책은 재미로 읽는 게 아닌데.. 전부 해서 2만원이요. "

연애소설만 사가는 폼이 골빈 년 같았나보군. 나는 이를 갈았다.

" 제가 아직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



집에 와서 화장을 지우고 무작정 드러누웠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배를 가만히 어루만져봤다.
마치 임신한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여자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기 배를 쓰다듬어보듯이.
그녀와 다른 점은 내 뱃속엔 꾸르륵 거리는 창자 밖에 없다는 거지.
아.. 나는 00양 비디오같은 건 한번도 보지 않았어. 포르노나 음란한 사진같은 거 본 적 없어. 로맨스소설은 최근 들어 약간 읽어봤고, 현실에는 없는 완벽 꽃미남이 나오는 만화나 좋아했을 뿐이야. 그런데 오늘 난 왜 이런거야!!



당신, 나에게 절대로 오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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