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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

2/2 안개낀 오후




곁눈으로 블로그를 훔쳐보며 물을 콸콸 따르다가 컵 밖으로 흘러넘칠 정도로 부어버렸다.
표면장력을 거뜬히 제압한 물살이 컵 주변을 흠뻑 적시고 드디어 바닥에까지 뚝뚝 흘러내렸다.
주변에 놔두었던 주유소티슈의 봉지를 북 찢어 덩어리째로 꺼내들고 얼른 물을 흡수시키면서 나도 모르게,
"에잇.. 씨...." 거친 표현이 나왔다.
욕 하기가 어색해 머뭇거리던 어린 크리스티나는 어디로 갔을까? 오늘, 두번째로 궁금해진 행방이다.


한가한 날이라서 어제부터 내리 쉬던 참이다.
식욕이 없어서 물만 먹고 지냈더니 머리가 띵하고 입에서 단내가 난다.
마냥 드러누워 있기도 허리가 아파서, 늘 입는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마을버스를 타고 도착한 종점에서 길을 건너면 [아름다운 가게]가 있다.
전엔 정말 싸고 좋은 중고품이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가격도 오르고 물건도 잘 살펴보면 그냥 '버린 물건'이다.
업체 쪽에서 안 팔려서 기증한 기증품 코너를 좀 둘러보다가 파일노트와 귀여운 수첩과 파스텔을 샀다.
사실 나에겐 사용할 일이 없는 물건들이다.
노트류를 좋아해서, 수첩을 모으니까, 파스텔을 보니 고등학교 미술시간이 생각나서... 사버렸다.


다시 한번 길을 건너 동대문 도서관을 갔다. 낭패. 공사중이다.
한갓진 도서관 앞 놀이터에는 노숙자들이 자리를 깔고 소주를 나눠마시고 있다. 미리 알아보고 오는 건데.
그렇게 허탕을 치고 돌아서니 더이상 갈 곳이 떠오르질 않았다. 결국 근처의 대형할인마트로 향했다.


어제 낮에 한바탕 장을 보고 온 터라, 둘러봐도 더이상 살 건 없다. 다만 어제는 주차공간이 없어서 옥상을 향했을 정도로 북새통이었지만, 오늘은 매장에 몇 명 안되는 사람들이 어슬렁거린다.
캐셔들은 몸을 비비꼬며 서 있다가 옆의 다른 캐셔와 한두 마디 잡담을 시도하는 중.
월요일 오후 2시 50분. 일요일에 이 매장에 있던 그 많던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에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사무실에서 열심히 전화통화 중일까?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있을까? 따분하고 약간 졸리운 기분으로 책을 읽고 있을까? 커튼으로 창 밖의 세상을 차단하고 한창 잠에 빠져있을까? 그들의 행방이 궁금했다. (첫번째)


돌아오는 길에 책대여점에 들르니, 오래된 벗과 같은 늙은 독신의 주인장은 무협소설을 읽는 중이다.
계산대 위에 비닐로 포장된 한 송이 장미가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 아저씨, 저 장미는 뭐에요? " / " 몰라요, 누가 놓고갔나보지."

" 오호..^^ 아리따운 아가씨가 아저씨한테? " / " 아니라니깐. 나도 모르는데 저게 저기 있더라구? "

" 그렇게 즉답을 하셔도 좀.. ㅋㅋ 이럴 땐 상상력을 발휘해야 된다구요. " / " 하하, 싫어요~ "

" 싫긴 뭐가. 여자가 무서운가봐? " /
" 맞아~ 여잔 무서워~ 하하하 "


온 몸이 녹신해지게 돌아다니고도 실속이 없던 나에게, 그냥 되는 대로 지껄인 잠깐의 대화가 웃음을 주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르헨티나 아줌마]와 이리리의 [광시곡]을 빌리고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오레오쿠키를 조금 먹고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내일은 또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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