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짧아서 첫날부터 어딘지 서두르게 되고, 추위는 점점 사그라들고,
발렌타인데이 즈음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행복한 준비를 구경할 수 있고,
봄을 맞게 되는 설레임을 가질 수 있으니까.
달려나가려다 몇 번을 고꾸라진 내 곁을, 묵묵한 걸음으로 지나쳐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 부럽다고, 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고 저혼자 화를 내고 엉엉 울어대기 일쑤다. 그들은 쉬엄쉬엄 움직이는 듯 한데도, 어느새 저만치 가있다. 안목이 짧아 겉만 보고 그러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어디서 받은 능력인지 저들은 내면도 충실하게 채우며 산다. [졌다, 완전히 졌어!] 외치려는 순간, 맘에걸리는 게 너무나 많다. 성실함이 부족했고, 배움이 부족했고, 인생은 끝이란 게 따로 없지 뭔가.
학창시절에 은사님께서 "넌 생각이 너무 많아. '많이' 하지 말고, '깊게' 해라."하고 충고해주신 일이 있다. 당시에도 공감은 했다. 헌데도 지금껏 개선을 못하고 산다. 은사님 그 분은 우리 학교를 떠나신 후 외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으시더니, 어느날 교직을 그만 두고 갓 결혼한 아내와 훌쩍 해외선교활동을 떠나셨다. 한동안 동남아에서 선교수업을 받으시더니 지금은 아마존의 오지에 계신다고 들었다. 느닷없는 듯 적어놨지만, 실은 우리를 만나 첫 교편을 잡으실 때부터 "내 꿈은 선교사"라고 공공연히 밝히셨던 분이다.
내 영혼의 정수(essence)에 악(惡)은 어느정도나 차지하고 있을까? 본질적으로 악으로 채워져 태어난 인간이 아닐까, 살면서 몇번 의심해봤다. 어린 시절 늦잠을 자면 어머니께서 "잠 마귀가 붙었나, 그만 일어나라!"하며 깨우셨다. 그걸 고해성사실에 들어가서 "저에게 잠 마귀가 붙었어요."라고 고백했더니, 신부님께서는 아연해하셨다. "그게 마귀냐?".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태함과 불성실함은 나쁜 짓이 아닌가? 이제와 생각하면, 신부님은 잠을 잠으로 받아들이신 거고, 나는 잠을 더 확장해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 것까지 걱정(생각)할 필요 없어."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그 쪽까지 생각이 미칠 뿐인데, 그런 말 듣는 게 기분나빴다. 그게 날 걱정해주는 말투라니 더 화가 났다. 니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헌데 한편으론, 남이 나에 대해 알 턱이 없다. 이심전심이란 게 말이 쉽지, 나야말로 필요한 말만 청해놓고 날 왜 모르냐고 묻는 건 어불성설이다. 회사 선배가 이런 행동은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나에게 "니가 내 사정을 알아?"하고 화를 냈다. 니 맘을 몰라주는 게 아니라, 너에 대해 알 필요가 없는 거지. 그땐 그렇게 생각해놓고 이제 와서 나도 같은 목소리로 서운해하다니.
오늘도 이것 저것 떠오르는 건 많은 데, 하나로 잡히는 결론은 없다. 아니면 결론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던가.
[열심히 살자!] 이따위 구호 정말 짜증나는데, 요즘 내 블로그를 보면 잊을만하면 그 소리다. 본인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남들 사랑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건 좋아한다는 것부터가, 나와 타인을 교집합 없는 벤 다이어그램처럼 생각하는 것이 뻔한데 꼭 '나 이렇게 긍정적으로 사는 건실한 사람이요~'하고 대자보 붙이듯이 포스팅을 한다.
머릿 속은 사념의 이동속도가 너무 빨라, 앗 하는 순간 꼬랑지를 놓친다. 단계란 것도, 순차란 것도 없이 일차적으로 생각한 걸 얼른 내뱉어놓지 않으면 그건 그냥 아듀다. 실제로 만나 대화를 하면 경박하다는 평을 듣는다. 잊어버리기 전에 말해두려고 생각한 것을 여과없이 배설한 탓이다. 경박하기 싫어 가만히 듣고 있으면 상대편에서 재미없냐며 안절부절한다. 왜 대화라는 것은 대꾸를 해야하는 가. 각자 잠자코 있다가 한 마디씩 던져도 불편하지 않은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믿을 게 나 하나뿐이라, 나에게서 가치를 찾다보니 이렇게 교만한 자가 되어버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속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높여 말한다. 바꿀 의지는 있는가? 2월은 짧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