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느린' 사람이다. 걸음이 느리고, 알아듣는 데 오래 걸리고, 자신의 감정조차 뒤늦게 깨닫는다.
달리기를 하면 맨날 꼴찌를 하고, 애들이랑 얘길하다보면 못 알아듣고 엉뚱한 대꾸를 해대는 모습은
아무래도 나의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그런 건 '천천할 서(徐)'자를 성씨로 가진 탓이라고 은근슬쩍 핑계를 댔다.
"애가 왜이리 빠릿빠릿하질 못해?"하고 질책당해도, 타고난 성씨가 느리니 어쩔 수가 없는 거였다.
이러다 똘똘한 서(徐)씨를 만나게 되면 어쩌려구 그래? .....다행인지, 아직 못 만났다. 하하
"내 이름은 무슨 뜻이야? "
"조정에서 놀고 있는 예쁜 아이라는 뜻이지."
"조정이 어딘데?"
"임금님이 계신 곳이지."
사실 임금님이 계신 곳은 꽃대궐이지, 조정은 임금님이 일하는 곳 아닌감?
여튼 조정이라는 어색한 해석이 등장한 이유는 내 이름 가운뎃자가 돌림자였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간 한자를
아버지 나름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풀어주신 듯 하다.
어쨌든 귀한 장소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예쁜 여자애의 이름 덕분인지,
재물복이나 귀티가 흘러내리진 않아도 오지게 고생하는 타입의 생김새는 아니다.
손이 작아서 배 하나 깎으려 해도 힘겨워하는 나를 보신 아버지의 위로는,
"손아귀가 작으면 고생을 안한덴다."라는 유래불명의 속설. 현실이야 어떻든 기분은 좋더라.
저녁에 작은 오빠를 만나서 순대국집에 앉아서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길 하고 있는데,
스포츠형인 오빠의 머리에 꽤 많은 흰 머리가 보인다.
"오빠 머리 많이 셌네?"
"어, 그래서 내가 머릴 못 기르고 이렇게 짧게 깎고 다니잖아."
"흐응.. 그냥 염색을 하지."
"염색약 쓰면 비듬이 생기데. 야, 그나저나 나 저번에 필리핀에 갔을 때 말야...."
흰 머리 얘기가 민망했나, 느닷없이 화제를 바꾼다. 이름대로라면 늘 '초록(푸르름)'이어야 하는 작은 오빠도 어느새 늙는구나 생각하니, 그딴 풀이가 삶을 이길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하긴 '어질어'야 하는 큰 오빠도 우리 어릴 때 잘못 걸리면 되게 팼지. 옛 생각에 갑자기 눈물나게 우스웠다.
"작은 오빠가 진짜 많이 맞았지."
"뭐?"
"큰 오빠 말야."
"아..하하.. 장난 아니었지. 그래도 저번에 보니까 그대로대. 모습도 그대로고, 유머도 여전하고."
"그렇게 여전해서 말술을 마시는구만...."
"원래, 우리 집안이 있지. 마시는 걸 좋아해. 아버지를 봐라. 칠순이 지나도 소주는 달고 계시잖아."
"안그래도 지난번에 술 잔뜩 취하셔서 전화하셨더라. 취하면 나한테 전화하는 버릇 좀 고치라고 했!"
"하하 그랬냐? 그래도 너니까 전화하지. 나한텐 전화 안하셔~"
그러고보니 아버지의 이름 속엔 '기쁨'이 있는데, 요즘 아버지는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계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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