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하도 추워서 그런가, 오늘따라 엄마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께서는 대단한 습관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일기쓰기'.
매일은 어렵더라도, 2-3일에 한 번은 대학노트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울 정도의 일기를 쓰셨는데, 자기고백이 강해서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던 무렵엔 '엄마 일기 훔쳐보기'가 고무줄놀이 다음으로 재미있는 놀이였다.
고백하자면, 명작으로 분류되는 문학작품보다 내게 더 큰 영향을 준 것이 엄마의 일기다. 여고시절엔 '나중에 엄마의 일기를 한 편의 책으로 묶어서 출판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있다.
엄마가 쓴 일기는 장문인 만큼 자세한 묘사가 되어 있어, 한 꼭지 한 꼭지 읽는 것이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솔직하기로는 남에게 보여주기 살짝 부끄러울 정도라, 나를 임신하셨을 즈음의 여러가지 몸의 변화까지 세세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추운 겨울에 정류장에서 손이 얼어버려, 천원에 네 개하던 토큰을 사서 그대로 손에 들고있다가 버스에 올라타면서 요금통에 한꺼번에 넣어버리시고는 원통해하시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취직한 큰 아들(오빠)에게 20만원을 생활비로 받았는데, 잘 세어보니 21만원이더라는 기쁨만발의 내용도 있었다.
가끔은 일기를 훔쳐보다가 엄마나 가족에게 들키는 일도 있었는데, '남의 일기를 왜 훔쳐보냐'며 약간 면박은 받았어도 다음날부터 일기를 숨겨놓거나 하시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 가족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도 소상히 알 수가 있었던 거다 ( 2008/12/02 - [.........고백] - 돈의 추억 - 네번째 를 포스팅할 때). 초등학교에 다니던 큰 오빠가 밤늦게까지 그려놓은 불조심 포스터를 새벽에 눈을 뜬 작은 오빠(5살)가 가위로 싹둑싹둑 오려놓는 바람에, 큰 오빠가 아침 댓바람부터 엉엉 울었던 일도 알고 있다.
엄마는 콜렉터로써의 재능도 보통 이상이라, 아버지와 사귀던 시절의 연애편지부터 여동생(막내이모)의 데이트장면을 찍은 사진까지 수십 년간의 기록과 앨범을 이사할 때마다 잘도 챙기셨고, 기념우표나 크리스마스씰도 발매될 때마다 시트 채로 구입해 여러권의 스탬프북에 고이 간직하시곤 했다. 그런 귀중한 우표들을, 나는 사춘기 시절에 친구한테 편지쓰는데 미쳐서 몰래몰래 뜯어서 죄다 사용했지만 말이다 (대부분이 전두환 기념우표였기때문에 현재는 전혀 아쉬움이 없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엔 이미 엄마의 키를 넘어섰는데, 절대로 내가 키가 컸기 때문이 아니다. 엄마의 키가 136c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애들한테 "니네 엄마는 난쟁이야."라는 놀림을 받는 건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어린 눈에도 늘 징그러웠던 것은 엄마의 휘어진 등. 엄마는 본래 150cm 정도의 키였으나, 척추 수술로 골반 부근 뼈를 잘라 이식하느라고 키도 작아지고 등도 휘어진 모양이 되었다고. 곧게 서계실 수는 있지만 등 모양만 불룩한 형태로,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살아서 걸어다니고 나를 낳은 것은 기적이라고 한다.
내 평생 엄마와 함께 공중목욕탕을 간 것은 6살 무렵의 딱 한 번의 경험이 전부이다.
그래도 엄마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탓하신 적이 없다. 주눅이 들어 밖에 못 다니거나 하지도 않았다. 특히 성당 봉사는 누구보다 열심이라, 어머니의 장례미사 때에는 우리 성당에 부임하신 지 얼마 안되었던 신부님께서도 어머니를 기억하고 애도해주셨다. 공중목욕탕을 다니지 않으신 이유는 남들의 눈을 배려하신 탓이다.
어머니를 산소에 모시던 날에 막내이모는 기원하셨다.
"언니. 다음에 태어날 때는 마릴린 몬로처럼 예쁜 여자로 태어나서, 부잣집에서 호강만 하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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