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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RESUME - 첫 알바





처음 돈을 벌어본 것이 93년도다.
합격자발표가 나고 바로 시작한 일이 집 근처의 패스트푸드점 알바였다. 살던 곳이 이태원이라, 내가 일하는 매장에는 외국인손님이 많았다. 미군들도 많이 오고, 관광객도 많이 왔다. 그때는 중국인 볼 일이 별로 없었다. 백인종  아니면 일본사람이 많았다. 영어는 알아듣기만
하면 대답은 거의 yes나 no 였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는데, 일본인들이 골칫덩어리였다. 어느날엔 어떤 일본여자가 주문을 하면서 "고히~! 고히~!" 하는 데, 뭘 말하는 지 몰라서 한참을 바디랭귀지하고 나서야 그게 바로 [커피]라는 걸 알았다...


현재는 그 체인이 없어졌는데, 특히 이태원점은 Half-Self Service (半 셀프서비스)라고 해서 음식은 손님이 주문하면서 직접 받아가고, 먹고 난 후에 테이블을 치우는 일은 홀에서 대기하고 있는 crew (직원) 들이 맡아서 했다. 그게 미국에 있는 본매장의 방식이라서 이태원이 주로 외국인을 상대하는 지역임을 고려해 똑같이 서비스하는 거라고 들었다.


제일 신참인 아르바이트생이 시작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인데, Dining 이라고 불렀다. 행주를 들고 홀 한켠에 서있다가, 손님이 일어서면 재빨리 테이블을 정돈하고 행주로 훔치고, 먹고난 쟁반을 차곡차곡 모아뒀다가 주방에 되돌려주는 일이 나의 첫 임무였다.


방학때라서 알바생 중에는 상고에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대개는 날라리들이었다. 난 엄마가 하도 보수적이셔서 사촌오빠와 단둘이 얘기만 해도 혼이 날 지경이었는데, 걔네들은 벌써 화장을 하고 다녔다. 큰 길가에 있는 매장인데다, 이제 대학생이라는 점도 좋게 작용한 덕분인지 엄마는 알바까지 금하시진 않았지만, 죄송스럽게도 그때 그 곳이 내게는 내가 알던 "당연함"을 완전히 뒤집는 정반대의 사람들을 경험하게 해준 곳이었다. (데미안을 만나기 전, 혼란을 겪던 징클레르처럼 말이다..)


10대 여자애들이 들어와 담배를 피우고, 매춘부가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창가에 앉아 손님을 물색하고, 중학교를 중퇴하고 매장에서 잠깐씩 알바를 하며 담배값을 버는 하릴없는 청춘까지. 뭐가 그렇게 떳떳한지 당신의 나로써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인종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을 경멸하지 않았다. 마냥 신기하고, 특별했다.  안면이 생겨 눈인사 정도는 나누게 된 그 매춘부에게는 팁으로 천원을 받아보기도 했다. Dining 에서 승진(?)을 거듭해 가장 높은 Cashier 에 올랐을 때는 중학교를 중퇴한 그 친구(남자이고 동갑이었는데 주로 주방에서 일했다)- 계산대와 주방이 함께 붙어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 서로 좋아하는 팝송 테이프를 갖고 와서 매장BGM으로 틀어놓고 함께 감상하고 얘기하는 재미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 친구가 본조비를 참 좋아했다. 그치? OO아..)


그때 한달을 일하고 번 돈이 20여만원이었다. 시급이 1050원이었으니까, 하루에 꽤 많은 시간을 일했던 거다. 오후 3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매장문을 닫고 퇴근했다. 녹초가 되고도 헤어지기가 싫어서 OO이랑 함께 편의점에 가서 꼬마김치와 사발면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집 앞까지 바래다주려나 기대했는데, OO이는 한번도 그러지 않았다.
하루는 매니저가 우리 둘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야, 너넨 어쩜 동갑인데 그렇게 (질이)다르냐?" 하고 농담을 했다. 말이 너무 심한 것 같아 나도 모르게 OO이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 녀석은 그런 말을 듣고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보면 늘 남을 웃기고, 짖궂은 놀림을 받아도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는 새, 봄이 왔다. 입학하고부터는 역시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3월말에 그 곳을 그만두었다. 3개월 정도 일한 셈이다. 간혹 숙제하러 왔다는 핑계로 가보기도 했는데, OO이는 벌써 그만뒀는지 보이질 않았다. 눈치없이 필통과 대학교재를 테이블에 주섬주섬 꺼내놓는 나를 보는 다른 알바생들의 시선이 곱질 않았다. 그들은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고졸도 힘겨운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렇게 몇 번을 들락거리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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