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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RESUME - 세번째 알바



커피숍을 호기롭게 관두고 나왔지만, 그래봤자 새 알바를 구해야 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더니 일을 알아봐도 꼭 서비스직만 알아보고 다녔다. 하지만 매장에서 일하는 것이 페이도 약하고, 체력적으로도 피곤해서 그냥저냥 알아보는 시늉만 할 뿐, 딱히 나쁘지 않은 자리가 생겨도 덤벼들지 않고 냅두었다. 맨날 우거지상을 하고 다니는 1학년 짜리가 좀 신경이 쓰였는 지, 선배 한 사람이 나에게 왠 아줌마 한 분을 소개했다.

"너 아르바이트 구한다며? 이 분 처음 뵙지? 우리학교 대학원 다니시는 선배님이셔. 이 분도 일해줄 사람 찾는다고 하시길래, 니 생각이 나서 말씀드렸더니 한 번 보자고 하셔서."



밝은 미소로 먼저 인사를 건네시는 선배님께 얼떨결에 인사를 드렸다. 일의 내용인 즉, 자기 남편이 연구를 하는 중인데, 그 작업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다고 간단하게만 설명하셨다. 일해볼 의향이 있냐고 물으시는 데, 나는 이제껏 해온 몸으로 때우는 알바가 아니라 뭔가 학구적인 알바를 해본다는 것에 두 눈이 번쩍 뜨여서 무조건 하겠다고 매달렸다. 그 분께서는 가뿐한 표정으로 백을 집어들고 일어서더니, 내 손을 잡았다.

" 그럼, 우리 집에 가자구. "



선배님 댁은 성북구 장위동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몇 번이나 몇 번을 타서 어느 정류장에 내려야하는지를 가르쳐주셨다.

" 이 일을 하려면 우리 집에 자주 와야할테니까 말이야."

정류장에 내려 멀지 않은 거리를 걷는 동안, 나는 어느 가게를 지나쳐서 몇번째 골목으로 들어와야 하는 지 머리 속에 새겨두었다.



집은 방 두칸의 작은 전셋집이었다. 안방에 들어서니 그 댁의 주인어른이 앉아계셨다. 그 방을 채운 것은 286컴퓨터 한 대와 앉은뱅이 책상, 그리고 원서가 가득한 책장과 보온을 위해 깔아둔 이불(우풍이 정말 심했던 집이었다) 위에 잔뜩 널려있는 인쇄물이 전부였다. 왜 앉은뱅이 책상이였냐면, 내가 앞으로 도와드려야 할 그 주인양반이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이셨기 때문이다. 함박웃음으로 나를 맞아 악수를 청하신 그 분(이하 '마스터')은 잠깐 나에 대해 몇가지 질문을 하시더니, 곧장 일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갔다. 내가 할 일은 마스터가 원하는 자료를 대학도서관에서 찾아다가 복사해서 전달해드리고, 필요할 때는 워드로 타이핑을 해서 파일링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도서관 2층에 있는 전문자료실에 주로 박혀 살았다. 2층에는 복사실도 딸려 있었으므로, 일이 수월했다. 한 달 정도 열심히 작업을 했더니 슬슬 구할 수 없는 것들이 추출되기 시작했다. 마스터가 말했다.

" 음, 방대한 작업이니까, 거기서 전부 해결할 수 없는 건 당연해. 이제 다른 곳을 뒤져봐야겠지? "



도서관장님이 마스터의 후배였기 때문에, 기꺼이 나를 위해 여러 장의 추천장을 써주셨다. 나는 추천장을 들고 서울대, 연세대, 총신대, 감신대, 서강대 등등 각 대학의 도서관을 순회해야 했다. 타 대학에 방문해서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는 건물에 들어가 본다는 것이 나에겐 무한한 영광이었다. 학교생활이 뒷전일 정도로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빈 가방을 들고 들어가 복사물로 가득 채워 빠져나올 때, 어깨는 아플지언정 마음은 뿌듯했다. 친구는 내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며 ' busy girl ' 이라는 새 별명을 붙여줬다. (예전에 맨날 놀러만 다닐 때의  별명이었던 ' free girl ' 의 반댓말이라나...)



마스터의 연구는 내가 전공한 학과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으므로, 이 일은 학문에 임하는 시각을 넓히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에서 그 학문이 발전해 온 궤적을 총망라하는 작업이라서, 수업을 들을 때도 앞 뒤 맥락을 미리 알고 참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므로 이건 정말 특혜나 다름없는 알바였다. 그러나 시시각각으로 조여오는 문제라면 새 학년으로 올라갈 시간은 다가오는 데, 이 일은 수고비 정도의 수입만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약정한 월급이 적었는데다, 따로 활동비를 책정받지 못하는 탓이었다. 게다가 마스터의 형편은 초가삼간에 사는 선비님과 다를 바가 없어서, 감히 나는 거기다 대고 활동비를 달라고 건의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매일같이 강의가 끝나면 이 대학에서 저 대학으로, 집에 돌아오면 모아온 자료를 분류하느라 다른 재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냈던 나에게, 지금도 어이없게만 기억되는 그 날이 찾아왔다.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보니 아무도 없었다. 조금 있으니 갑작스럽게 작은 아버지께서 들르셔서, 우리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셨으니 물통이나 슬리퍼 같은 것 좀 챙겨서 따라오라는 것이다. 지금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고 했다.



'귀찮아..'라고 생각하면서 대충 물건을 챙겨서 작은 아버지를 따라갔다. 엄마는 맨날 아픈 사람이면서, 그래도 집에서 아플 것이지 병원에 입원해버리면 그 돈은 또 어떡하란 말이지.. 하면서 화를 내며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괴로워하다가 결국 병원까지 오게된 엄마는, 검사 후 즉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던 거였다. 일반병실에 남아있는 엄마의 외투를 챙겨야했다. 군고구마장수나 입을 것 같은 낡은 외투를 걷어 든 순간, 와르르 쏟아진 것은 수십 정의 사리돈.



그 다음날, 엄마는 돌아가셨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가장 심하게 자신감을 잃은 날이다. 입원비가 아까웠던 나는 도대체 뭐하는 인간인가. 무얼 갖고 싶어서 살아가는 인간인가. 무슨 생각을 해도 맥이 잡히질 않는채 다음 날은 역시 오고, 해는 뜨고, 달이 뜨고, 장례가 있는 동안 내가 밥을 굶은 것도 아니요, 화장실을 참은 것도 아니었다. 조문객이 오면 인사를 하고, 잠깐 쉬러 집에 와보면 냉장고엔 엄마가 담은 김치가 그대로 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 밖에는 만사가 그냥 원래대로 흘러갔다.



발인을 하고 돌아온 날 밤에는, 혹시 엄마가 관 속에서 다시 살아나서 겨우겨우 무덤을 헤치고 나오는 데 성공하더라도, 어떻게 그 먼 길을 (차비도 안 넣어줬는데) 걸어서 집까지 돌아올지가 걱정이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걱정을 했다. 이제 우리집은 아버지와 오빠 둘과 나까지 네 식구가 사는 곳이 되었고, 당연히 하나뿐인 여자애인 나는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야해서.. 그렇게 세번째 알바는 마스터의 위로를 받으며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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