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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좋지 아니한가



 



두피가 건성인지 아니면 반대로 지성이라 기름기가 흘러서 그런건지, 머리를 감고 하루가 지나면 가려워 죽겠다.
오늘도 아침부터 파자마바람으로 머리를 벅벅 긁어대면서 집안을 돌아다녔다. 설렁설렁 긁어대다가 삘 받으면 아예 열손가락을 죄다 머리카락 속에 쑤셔넣고 고개까지 푹 꺾어가며 미친듯이 긁어댄다.
이럴땐 옛생각이 나지.. 고딩때 독서실 옆자리에 앉았던 영선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이런 내가 싫어~"  ㅎㅎㅎ



아무튼 오늘은 낮까지 퍼자고 1시쯤에 일어나서 대충 물만 마시고 어영부영 햄들이랑 놀다가 진하게 화장을 하고 놀러나갔다. 내게 진한 화장이라 하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여자같은 화장이라고나 할까.
그라데이션 이딴거 다 밟아주고 기냥 처덕처덕 발라대는 거다. 바른데 또 바르고 또또 덧칠하고 또또또 ...;;



아무튼 마무리로 선글라스까지 처억 껴주시고 밖에 나갔다. 약속 없다. 산책을 빙자한 방황을 하러 나갔다.
제 1코스는 고려대, 제 2코스는 경동시장, 제 3코스는 답십리 홈*러스다.
가는 길에 GS에서 900원짜리 연어치즈김밥 사들고 갔다. 또 사진관도 들렀다.
어제 저녁에 맡겼던 필름사진을 찾아가지고 단골로 가는 고려대 중앙도서관 앞으로 갔다.



그 곁에 법학관 건물이 있다. 별로 눈치도 안보고 척척 들어가서 1층 복도 끝에 있는 자판기에 먼저 출첵.
거기 음료수는 죄다 500원이다. 다행히 조지아커피도 판다.
캔을 뽑아서 건물을 나서면 내 자리인 중앙도서관 앞 벤치로 간다.
다리꼬고 앉아서 김밥이나 씹어먹고 캔커피나 마시면서 건들건들 앉아 있는다.
광장을 가로지를 땐 바람이 솔솔 불더니, 이곳은 건물에 막혀 바람이 없다.
하필이면 햇빛이 정수리에 내려앉는 시간에 맞춰 도착한 탓에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올랐다.



으슥해서 별로 맘에 안들어하던 반대편 벤치로 옮겨앉았다.
남은 커피를 빨아먹으면서 현상된 사진을 꺼내 한장한장 살펴봤다.
엄마한테 물려받은 낡은 카메라는 톤이 좀 낮은 모양이다.
사진들이 어째 맥이 빠진다.
그래도 100장이 넘는 사진을 부지런히 확인하고 도로 봉투에 넣었다. 이제 제 2코스를 향해 움직여볼까.



경동시장에서는 북한산 지네니 중국산 장미꽃이니 하는 별난 약재들이 포대에 담겨 한창 거래중이다.
여기 들른 김에 말린 번데기나 사갈까 했는데, 지갑을 열어보니 4천원밖에 없다.
기억에 의하면 한 되에 3천원, 두 되를 사면 5천원이었는데.. 두되 사려니 천원이 모자르네. 쉽게 포기했다.



약재상 앞에는 야채노점상이 줄줄이 나와있다.
빨간 바구니에 푸짐하게 담긴 야채들이 무조건 천원. 애호박도 3개 4개 담아놓고 천원이라고 써놨다.
난 이마트에서 지난주에 한 개 8백원이나 주고 샀는데. 많이 사봤자 쓸데도 없지만, 그래도 시장이 싸긴 싸구나.
이쯤 오니 어이쿠야, 사람이 무진장 많다.
인파를 헤치고 횡단보도 쪽으로 가서 까만 고무줄 팔던 할머니가 오늘도 계신가 하고 찾아봤지만, 그때 어디쯤에서 파셨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니 찾을 수가 없었다. 또한번 쉽게 포기한다.



웨딩홀 앞에서 길을 건너 답십리 쪽으로 내려갔다.
제 3코스는 정확히 말하면 답십리>홈*러스>햄스터매장이다.
예전엔 가면 담당직원이 없어서 내가 직접 직원을 찾아 헤매야 했는데, 오늘은 웬일로 매장에 꼬마애들이 바글바글한가 했더니, 직원이 직접 토끼를 꺼내서 구경시켜 주고 있었다.
애들을 헤치고 햄스터 진열장을 들여다봤더니 얼레, 겨우 아기 정글리안 한 마리만 고개를 쏙 내민다.



- 아저씨, 햄스터 하나밖에 없어요?



애들에게 토끼 만져주기 시범을 보이던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웃으면서 진열장 안으로 팔을 넣어 먹이통을 쓱 들어올렸다. 세상에~ 그 납작한 밥그릇 밑에 엄지손가락만한 햄아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때까지 토끼만 구경하던 꼬마들은 갑자기 출현한 나때문에 햄스터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그 중에 제일 작은 놈(화이트 로보) 하나를 지목했더니 직원이 꺼내준다.
내가 건네받아서 손바닥에 놓고 요리조리 간질여보는 데,
아이들도 만져보고 싶어서 저마다 손을 내밀었다.
아직 산 것도 아닌데 내맘대로 만지게 해주면서
"너희들 얘 만지고 나면 꼭 손 씻어야 돼~" 했더니 입을 모아 "네~" 한다.



그렇게 만지고 놀다가 햄이 느닷없이 점프를 하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뜨렸다.
평소 오두방정을 숨기지 못하는 인품에 걸맞게 놀래서 꺅 소리를 지르고, 당황해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햄에게 "미안해~ 미안해~" 하며 사과를 하는 등 벼라별 주접을 다 떨다가 결국엔 내가 떨어뜨린 그 화이트 로보와 특이하게 배가 노란색인 아기 정글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내일은 '거북이 달린다' 보러 가기로 했지.
어둠이 내린 방에서 불을 끄고 이어폰을 꽂은 채로 머리를 벅벅 긁어대면서 휴일은 역시 좋다는 생각을 한다.
소위 '황금같다'고 말하는 시간을 이렇게 막연하게 보내도 괜찮다싶은 날이니
얼마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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