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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술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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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적 배경은 미니홈피가 한창 붐이던 시절이다. 미니홈피 덕분에 연락이 된 대학시절 동기들과 모임을 갖게 되었다. 대학로 어느 찻집에서 오후 4시에 만나서 중간에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어느새 시간은 밤 9시에 다다르고 있었다. 동기들로 말할 것 같으면 학교다닐 때부터 술지게미를 거름으로 청춘의 싹을 틔운 애들이라, 엉덩이를 술집 의자에 뽄드로 붙여놓은 건지 도대체 술자리가 생겼다 하면 엄청 질기게 구는 애들이었다.


난 그날따라 술이 안 받았던 건지, 쉴새없이 새로운 500cc 잔을 돌려대는 상황에 지쳐버린 건지, 이미 취할대로 취해서 술이 나를 마시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난 취해서 이만~" 하고 일어나봤자, "그래~ 수고했어~ 잘가~" 하며 화답할 인종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몽롱한 머릿속으로 부지런히 도망갈 계책을 세워야 했다. 결국 핸드백을 숨기고 화장실에 들르는 척하면서 냅다 줄행랑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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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무렵이면 대학로 거리는 겨우 초저녁일 뿐이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헤치며 나는 비틀비틀 갈짓자 행진을 시작했다. 집에 가려면 버스를 타던가 지하철을 타야되는데, 그 와중에도 이른 시간부터 너무 취한 모습이 좀 창피했던지 우선은 술을 깰 요량으로 우리 동네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 한참 걷다보니 삼선교에 다다랐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엔 삼선교 지하철역 앞에 서울은행이 있었는데, 머릿속이 혼미했던 나는 은행 계단에 무너지듯 앉아버렸다.


'왜 이리 술이 깨질 않는걸까..' 손으로 앞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심해하고 있는데, 고개가 저절로 까딱까딱 거리기 시작했다. 고갯짓이 어째 규칙적인 걸..하며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봐요! 이보세요!!"

"응..?" 하며 올려다보니 낯선 아주머니다. "여기서 잠들면 어떻게해요! 얼른 집에 가야지..!"
깜짝 놀라 후다닥 일어나려는 데 술기운은 여전해서 앞으로 고꾸라질뻔하고 땅바닥은 출렁출렁 파도를 친다.
저도모르게 옆으로 누워 잠든 걸 깨워준 고마운 행인에게, 인사는 커녕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배틀배틀하면서 걸어 내려오는 데, 마침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이젠 무리다.. 차 타고 가자..'
요금을 넣고 버스 안을 휘~ 둘러보니 좌석엔 사람이 꽉 찼다. 별 수 없이 기둥 하나를 붙잡고 최대한 꼿꼿한 자세로 섰지만, 이상하게 다들 나를 쳐다보는 눈치다.
'너무 취해보이나..? 아님 내가 너무 예쁜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도끼병 증세를 보이면서 행복해하고 있는데,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다. 내려서부터 또 다시 왼발 - 오른발 - 왼발 - 왼발 - 오른발  이런 혼미한 스텝을 밟아서 겨우겨우 집에 왔다. 현관을 열자마자 나동그라진 나는 그대로.. 그대로..



***


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내가 누워있는 곳은 역시나 현관 앞 그곳이다. 그 정도는 쓰러질때 이미 인식했으므로 별로 놀랍지 않았다. 난 떫은 침을 삼키며 욕실로 향했는데, 거기서 거울을 보고 기함했다. 얼굴과 옷 위가 온통 시커먼 흙먼지 투성이였던 것이다. 은행 계단에서 잠들었을 때 묻어온 것인가보다. 환한 버스 안에서 왜 사람들이 나를 그리도 열심히 쳐다봤는지 그제서야 이유를 알았다...ㅠㅠ


사실 차림새가 더러워진 것보다도, 행길에서 잠들었으니 아리랑치기를 당했어도 할 말이 없다. 어쨌든 이 '노숙자 코스프레 사건' 이후로도 술을 끊지는 못 했지만, 밖에서 술을 마시게 되면 4차를 끌려가던, 5차를 끌려가던 죽어도 정신줄 놓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적.당.히 마셨다. 대신 집에서 월하독작을 하게 될 땐 맘껏 (퍼)마시고, 맘놓고 취해 대(大)자로 뻗어잤지만. ^^;; 올해부터는 술을 끊어서 이런 일마저도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