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에 사는 N과 만나기 위해 나는 국철을 타고 영등포역으로 갔다. 직장이 용산에 있었기 때문에 퇴근해서 출발하면 대개 7시 전에는 도착을 했다. 먼저 와서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있을 그를 위해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려고 매번 노력했지만, 회사원이 백수를 이길 수는 없었다.
N은 대학생의 신분이었지만 1년 휴학을 얻어 한가한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건강상의 문제..라기보다는 별 것도 아닌 치아교정으로 등교거부를 해대서 그의 집에선 하는 수 없이 휴학을 허락했던 것이다. 하여튼 나와는 몇 개월째 만나는 중이었고, 만나긴 만나는 데 어떤 사이라고 해야할 지는 나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영등포는 나름대로 중간지점이라는 생각에 골랐던 곳이 아니다. N이 편하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정해졌다. 유흥과 환락의 거리. 역을 나오면 오로지 술집과 노래방이 가득한 동네였다. 밤새 컴퓨터를 갖고 놀다가 아침 무렵에 잠이 들어 저녁이면 쌩쌩한 얼굴로 날 만나러 오는 그는, 남의 입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진정한 '철부지'였다. 친구인지 애인지 잘 모르겠다는 마음이면서 난 그를 만나러 갔다. 비사회적인 성격, 감히 흉내도 내기 힘든 피해의식, 별안간 팩 돌아버리는 난감한 성질은 언제 겪어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여가시간을 모조리 쏟아붓게 만든 그의 매력은 '똑똑함' 이었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나를 유혹하는 그의 풍부한 지식은 몹쓸 성격 따위는 논외로 만들만 했다. 얘기를 듣다보면 저건 천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 얘도 갈고 닦으면 쓸만해지겠구나! ' 하고 속으로 경탄할 때가 많았다. 나는 대화를 위해 소크라테스를 찾아가는 청년들처럼 저녁이면 그를 만나러 나갔다.
어쨌든 N은 나의 시간과 돈을 빌어 한가한 시간을 메꾸기 위해, 나는 백과사전같은 그의 머리를 빌어 우울한 시간을 타파하기 위해 지치지도 않고 만났다. 뭔가 뜻이 맞질 않아서 서로 환멸을 느끼며 헤어진 다음날에도, 전날과 다름없는 열렬한 자세로 약속을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
N의 친구 중에 한쪽 다리가 불편한 여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그를 몹시 좋아했다. 그런 그녀가 그의 집 근처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침에 출근준비를 하고 있는 나에게 전화가 왔다. 밤새 그녀와 함께 있어 주느라고 어제 연락을 못 했다고. 그 날 저녁에 언제나처럼 영등포역에서 만난 우리는 찻집에 갔다. N은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나는 요근래 점점 기분이 좋질 않았다. 내가 먼저 칼을 뽑았다. " 나랑 왜 만나? "
귀찮은 얼굴로 N이 대답했다. " 우린 사귀잖아... "
무릇 '사귄다'는 것은 '연애'를 뜻하고, '연애'란 것은 일반적으로 일대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던가?
한 인간을 앞에 놓고, [이건 똥일까, 된장일까]를 가늠해 본 것은 그것이 최초였나보다. 똑똑함에 반했다던 내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 버리니, 그는 또라이일 뿐 이었다. 네가 이야기 7.0 프로그램에 물들어 맨날 채팅으로 여잘 꼬시는 거, 난 다 알고 있었어. 새롬데이타맨을 까느라고 밤새 컴퓨터를 켜두고 씨름한 것도 다 알아. 번개팅이 생기면 연락이 안되는 것도 물론 알지. 그렇게 만나는 것들과 나를 별개로 치시겠다? 고마워 죽겠구나!!
그와의 만남을 접고 나서, 나는 억울함에 한동안 넋이 나갔다. ' 실은 나야말로 널 흔들어 놓고 싶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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